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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생소한 책을 가지고 왔습니다. 가타오카 이치타케 저자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입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 라캉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정신분석이 심리분석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여 읽게 된 책입니다. 라캉은 심리학자가 아닌 정신분석가였습니다. 정신과 의사에서 출발하여 프로이트가 창설한 정신분석의 임상실천을 재해석하고 현대적으로 부활시킨 인물입니다. 라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이 무엇인지 이해를 해야 합니다. 정신분석이란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는 많은 사람이 정신의학이나 임상심리의 도움을 받습니다. 이런 마음의 치료들은 표면적인 증상을 완화시켜 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원인의 치료는 아닙니다. 그러한 증상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원인을 바꾸기 위해서는 '사는 방식'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데 그것들을 알아가는 것이 정신분석입니다. 정신분석은 분석 주체가 스스로 무의식에 맞서고 그 근원으로 내려가 증상의 배후에 있는 무의식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변화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세계는 복잡한 가지(생각)들이 많이 뻗어 있습니다. 너무 복잡하게 뻗어 있어 어떤 방향으로 뻗어 있는지, 가지에 근원이 없다고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 생각에는 근원이 존재합니다. 사건을 통해 경험을 통해 억압된 상태가 되면 고착된 지점이 생기게 됩니다. 이는 자신을 넓히고 뻗어 나가는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무의식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회적동물이라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회적 자아가 형성이 되는데 인간은 쉽게 변하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변화하기 위해서는 1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어떻게 살것인가?"하는 인생의 과제가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잣대에 살다 보면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사람들이 나의 슬픔을 공감해 주고, 나의 아픔을 이해해 준다 할지라도 표면적 증상만 치료될 뿐 우리의 자아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기에 무의식이 교정되어야 완전한 치료가 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계속 반복되지만 우리의 자아를 의식하고 있다면 과잉된 감정을 어떻게 조절하게 만들 것인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국 치료 주체자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타인은 나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 역시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내 안에 무수히 뻗어있는 가지는 나 자신만이 알고 있습니다. '내 안의 나'가 형성되기까지 반복되는 요소들이 모여 자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폭넓은 이해가 되어야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당장 문제만 해결하려고 하면 마음의 빈곤은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가지고 싶은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 갑니다. 하지만 그 욕망을 충족했음에도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욕망은 무의식까지 채우기에는 역부족합니다. 그래서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에 대해서 즉 무의식을 알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반복하고 있는가?"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왜 이것을 자주 반복하지?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패턴이 존재합니다. 그것을 언제 깨닫느냐, 상처받을 때, 사건이 생겼을 때 깨닫게 됩니다. 이런 사건이 생겼을 때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사건을 겪고 나면 나의 주체를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평소 의식하지 못하고 살다가 어떤 사건으로 무의식이 의식으로 바뀌는 순간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것은 무의식이 아닙니다. 주체는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결국 인간은 일반성과 특이성의 균형을 이루고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은 언어를 가지고 살아 갑니다. 동물은 본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의 가진 속마음은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본능이 망가진 동물입니다. 본능은 자연과 조화롭게 어우러진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과 같은 본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무의식은 대타자라는 시니피앙이 모여 있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대타자의 말을 듣고 다양한 말(시니피앙)을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라캉은 이에 대해 "무의식이란 대타자가 전해주는 담화"라고 표현했습니다. 결국 인간은 언어의 세계에 참여함으로써 무의식의 주체를 탄생시킵니다. 이는 무의식이라는 그릇이 만들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출처

 

 

 

 

 

 

조금 전에 인간의 욕망은 충족될 수 없다 표현했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구멍'이기 때문입니다.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 노력하여 일시적인 만족(충동)을 느낄 수는 있지만 영원히 그 구멍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다른 것'을 추구하는 즉 또 다른 욕망을 추구하게 됩니다. 욕망은 욕구와 요구 사이의 간극에서 생기는데 욕망은 시니피앙적으로 구조화되어 이으며 상징계의 법을 따릅니다. 결국 욕망은 고통속에 쾌락을 느끼면서도 계속 충동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을 '주이상스'라고 합니다. 주이상스는 욕동(충동)이란 만족을 향하여 인간을 나아가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라 합니다. 고통 속에 쾌락을 즐기기 때문에 힘든 과정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라캉은 인간의 근원적인 목표가 욕동(충동)의 만족이고 욕동의 만족이 향락이라면 "인간의 최종 목적이란 향락을 얻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왜 그렇게 향락을 즐기려 하는 걸까요? 아마도 거기에는 뭔가가 있다는 환상이 있습니다. 이걸 하다 보면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착각에 빠집니다. 하지만 얻고 나면 또 다른 향락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라캉은 욕망하고 싶어하는 것을 "대상 a"라 했습니다. 내가 어떤 것에 집착하고 의존하고 '반복'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어떤 무의식이 '반복'을 하느냐는 내가 어떤 기질을 가지고 있느냐를 알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과 마주했습니다. 그것보다 내가 무엇을 '반복'하는지 아는 것이 무의식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만족이 없는 구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타인을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시기를 합니다. 라캉의 정신분석 관련 도서를 읽고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미친 듯이 뻗어 있는 근원을 찾아가기보다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소 읽은 책과 너무 다른 장르라 어려웠지만 즐거운 독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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